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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경상남도교육청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학생들의 올바른 인식과 의식 제고를 위해 2012년 12월에 제작한 것으로, 현재와 수치상 일부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김복득(95) / 강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 거기 가서 당한 일을 보면 씹어 먹어도 분이 안 풀리는데, 그렇게 못 하니까 일본 가서 그렇게 시위를 했으면 이제 사죄할 때도 됐는데 그것도 안 하고 내가 나이 이렇게 되어서, 되어 가지고, 내가 죽기 전에 (일본이) 사죄를 하고, 사죄를 받아야 하는데 그걸 못 받으니까 그게 한입니다. 다른 건 없어요,
< 해설자나레이터 > 나는 김복득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최고령. 강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입니다. 나는 일본이 결코 숨길 수 없는 부끄러운 원죄의 역사이며, 대한민국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고통의 역사입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해설자나레이터 > (강제 일본군 ‘위안부’ 1930년대 초부터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1945년 8월 사이에 걸쳐서 일본군의 성 위안을 위해 집단으로 동원하고 관리한 여성을 말한다. )
나를 잊지 마세요.
(경상남도 통영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행복했던 기억도 슬프고 아팠던 기억도 세월이 흐르면 옅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다 그렇게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고, 그래서 가슴에 상처를 내고 상처를 곪게 하는 기억도 있다. (그림 : 故 김순덕 할머니 - 끌려가는 날) (그림 : 강일출 할머니 - ‘일본군’ 위안부) 올해 95세의 김복득 할머니, 그녀의 가슴속에는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커다란 상처가 있다. 8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고통의 과거, 강제 일본군 위안부로 살아야 했던 8년의 세월이다.
< 2009년 김복득 할머니 증언 > 그때는 고모 집 간다고, 고모 집이 어디 있냐 하면 (거제) 장승포에 있었거든. 배 타러 나가다가, 돌아가다가 (이웃집 아저씨가) 잠깐 와 보라고 해서 갔다. 가니까 좋은 데 취직할 데가 있으니까 가겠냐고 묻는데 안 가겠다고 하니. 배를, 작은 배를 타라. 타면 안 죽는다. 그렇게 안 하면 난리를 치고 그러는 모양이지. 그때 배를 타고 가서……. 남자들한테……. 내 평생 안 당했던 일인데…….
(故 강덕경 할머니 - 빼앗긴 순정)
< 나레이터 >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나이의 소녀에게 낯선 타국땅에서의 위안부 생활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도 참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주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참극들 역시 어린 소녀를 더욱 아프고 힘들게 만들었다.
< 2009년 김복득 할머니 증언 > 어쩌다가 임신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런 사람은 데리고 나가서 총살해버려. 도망가는 여자들 잡으면 총살시키고. 한 여성으로서 당한 치욕도 씻을 수 없는 상처지만 그것이 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닌 한 국가와 잘못된 권력으로부터 받은 상처라는 것이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김복득 할머니 한 사람. 위안부 피해자들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모든 가슴에 난 베이고 곪은 생채기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증언 중에서 출처: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e역사관
< 故 김학순 할머니 > 그때 생각을 하면 정말 기가 막혀요. 그 어마어마한 군인들이 강제로 달려들 적에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와요. 그때 생각을 안 해야지 하면 내 마음이 아주 그냥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어요.
< 김군자 할머니 > 16세에 끌려가서 저항하다가 무수히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아서 지금도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하루에 40여 명의 성 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 일본 정부가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여기 있는 할머니들 모두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귀신이 되어서 수요 집회에 나올 거야!
< 나레이터 > 김복득 할머니에겐 피붙이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 거제시민 모임 송도자대표, 그리고 통영여고를 비롯한 주변 학교의 자원봉사 학생들이다. 홀로 지내고 있는 할머니에게 가족의 빈자를 채워주는 이들이 있어 한 번 더 웃고 희망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2012년 10월 2일 하동군 북천면)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이 눈부시던 날, 김복득 할머니는 가을 꽃 나들이에 나섰다. 코스모스 꽃과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보며 할머니는 꽃보다 더 환하고 밝게 웃었다. 할머니의 마음은 어쩌면 꽃밭 안에서 해맑게 웃으며 마음껏 뛰노는 열여덟 소녀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통영여고 학생들에게 김복득 할머니는 또 다른 큰 의미이기도 하다.
(2012년 4월 30일 김복득 할머니, 통영여고에 2천만 원 장학금 기부) 2012년 4월 할머니가 평생 모은 2천만 원을 통영여고의 장학금으로 기부한 것이다. 나라 잃은 설음과 가난 때문에 마음껏 누려보지 못한 아름다웠을 청춘을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좀 더 드넓게 펼칠 수 있었을 자신의 꿈을 할머니는 학생들을 통해 느껴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고령의 나이에도 할머니는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 없이 나선다. 1994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등록한 이후 각종 인권 캠프와 수요 시위. 일본 나고야, 오사카 증언집회와 교류회에 참여하는 등 지금까지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다. 정부의 ‘위안부’피해 사실을 신고 등록한 국내 피해자는 총 236명. 그중 생존자는 단 60명뿐이다. 부끄럽다는 이유로 남이 알까? 무섭다는 이유로 세상에 자신을 들어내지 못하는 피해자들도 많다. 김복득 할머니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을 위해 그리고 뼈아픈 역사를 깊이 새겨야 할 우리 모두를 위해 오늘도 일본의 진정한 사죄를 원하고 있다.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 및 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 있다면 한국에서 내놨으면 좋겠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NHK 기사 캡쳐)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 잘못 인정은 커녕 또 다른 만행을 저지르며 할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본 일부 극우단체들. 할머니의 아픔이자 우리 모두의 아픈 역사를 외면하는 사람들 이들은 할머니에게 또 다른 상처를 만들고 상처를 깊어지게 한다. 애써 상처를 덮어가며 더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는 김복득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에게도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 2009년 김복득 할머니 증언 > 죽기 전에 정말(일본의) 사죄를 받고, (일본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나는 그게. 그게 제일 소원이다. 다른 건 없다. 나는 이런 말만 하면 때린 듯이 눈물이 난다. 할머니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눈물이다. 할머니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이 눈물과 아픔은 역사를 바로 잡는 밑거름이어야 하며,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죄를 이끌어 내는 힘이어야 한다.
< 고영진/경상남도 교육감 > (김복득) 할머니가 증인이 되셔서 할머니가 일생을 살아오시면서 겪었던 것, 또 일본에 끌려가서 여러 가지 겪었던 것, 그런 생생한 기억들을 우리가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학생들에게 중요한 교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 나레이터 > 이제 세월은 흘러 모든 것이 변하고 열여덟 소녀는 아흔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됐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통해 여성의 존엄성을 말살했던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이행이 실행될 수 있도록 우리가 보다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2009년 김복득 할머니 증언 > 질문자 : 가장 하고 싶으신 게 뭐예요? 할머니 : 그냥 시집, 시집……. 질문자 : 시집가는 거요? 할머니 : 시집가는 거……. 질문자 : 족두리 쓰고 시집가셔서요? 할머니 : 시집가서 그냥 아웅지웅 살아. 할머니 : 요새 나이 많은 노인들도 손잡고 다니잖아. 그런 게 힘이 들더라. 그러고 한 번 살아 봤으면 싶은 거야. 질문자 : 그게 지금 가장 어머니 소원입니까? 할머니 : 그게 가장 소원이야.
< 나레이터 > 김복득 할머니의 소박한 소원, 시집가서 아웅지웅 살고 싶다는 그 평범한 일상을 다음 생의 소원으로 간직해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김복득 할머니의 용기와 그 안에 간직된 희망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김복득(95) / 강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 거기 가서 당한 일을 보면 씹어 먹어도 분이 안 풀리는데, 그렇게 못 하니까 일본 가서 그렇게 시위를 했으면 이제 사죄할 때도 됐는데 그것도 안 하고 내가 나이 이렇게 되어서, 되어 가지고, 내가 죽기 전에 (일본이) 사죄를 하고, 사죄를 받아야 하는데 그걸 못 받으니까 그게 한입니다. 다른 건 없어요,
< 해설자나레이터 > 나는 김복득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최고령. 강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입니다. 나는 일본이 결코 숨길 수 없는 부끄러운 원죄의 역사이며, 대한민국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고통의 역사입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해설자나레이터 > (강제 일본군 ‘위안부’ 1930년대 초부터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1945년 8월 사이에 걸쳐서 일본군의 성 위안을 위해 집단으로 동원하고 관리한 여성을 말한다. )
나를 잊지 마세요.
(경상남도 통영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행복했던 기억도 슬프고 아팠던 기억도 세월이 흐르면 옅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다 그렇게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고, 그래서 가슴에 상처를 내고 상처를 곪게 하는 기억도 있다. (그림 : 故 김순덕 할머니 - 끌려가는 날) (그림 : 강일출 할머니 - ‘일본군’ 위안부) 올해 95세의 김복득 할머니, 그녀의 가슴속에는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커다란 상처가 있다. 8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고통의 과거, 강제 일본군 위안부로 살아야 했던 8년의 세월이다.
< 2009년 김복득 할머니 증언 > 그때는 고모 집 간다고, 고모 집이 어디 있냐 하면 (거제) 장승포에 있었거든. 배 타러 나가다가, 돌아가다가 (이웃집 아저씨가) 잠깐 와 보라고 해서 갔다. 가니까 좋은 데 취직할 데가 있으니까 가겠냐고 묻는데 안 가겠다고 하니. 배를, 작은 배를 타라. 타면 안 죽는다. 그렇게 안 하면 난리를 치고 그러는 모양이지. 그때 배를 타고 가서……. 남자들한테……. 내 평생 안 당했던 일인데…….
(故 강덕경 할머니 - 빼앗긴 순정)
< 나레이터 >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나이의 소녀에게 낯선 타국땅에서의 위안부 생활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도 참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주변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참극들 역시 어린 소녀를 더욱 아프고 힘들게 만들었다.
< 2009년 김복득 할머니 증언 > 어쩌다가 임신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런 사람은 데리고 나가서 총살해버려. 도망가는 여자들 잡으면 총살시키고. 한 여성으로서 당한 치욕도 씻을 수 없는 상처지만 그것이 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닌 한 국가와 잘못된 권력으로부터 받은 상처라는 것이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김복득 할머니 한 사람. 위안부 피해자들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모든 가슴에 난 베이고 곪은 생채기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증언 중에서 출처: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e역사관
< 故 김학순 할머니 > 그때 생각을 하면 정말 기가 막혀요. 그 어마어마한 군인들이 강제로 달려들 적에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와요. 그때 생각을 안 해야지 하면 내 마음이 아주 그냥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어요.
< 김군자 할머니 > 16세에 끌려가서 저항하다가 무수히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아서 지금도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하루에 40여 명의 성 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 일본 정부가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여기 있는 할머니들 모두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귀신이 되어서 수요 집회에 나올 거야!
< 나레이터 > 김복득 할머니에겐 피붙이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 거제시민 모임 송도자대표, 그리고 통영여고를 비롯한 주변 학교의 자원봉사 학생들이다. 홀로 지내고 있는 할머니에게 가족의 빈자를 채워주는 이들이 있어 한 번 더 웃고 희망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2012년 10월 2일 하동군 북천면)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이 눈부시던 날, 김복득 할머니는 가을 꽃 나들이에 나섰다. 코스모스 꽃과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보며 할머니는 꽃보다 더 환하고 밝게 웃었다. 할머니의 마음은 어쩌면 꽃밭 안에서 해맑게 웃으며 마음껏 뛰노는 열여덟 소녀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통영여고 학생들에게 김복득 할머니는 또 다른 큰 의미이기도 하다.
(2012년 4월 30일 김복득 할머니, 통영여고에 2천만 원 장학금 기부) 2012년 4월 할머니가 평생 모은 2천만 원을 통영여고의 장학금으로 기부한 것이다. 나라 잃은 설음과 가난 때문에 마음껏 누려보지 못한 아름다웠을 청춘을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좀 더 드넓게 펼칠 수 있었을 자신의 꿈을 할머니는 학생들을 통해 느껴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고령의 나이에도 할머니는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 없이 나선다. 1994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등록한 이후 각종 인권 캠프와 수요 시위. 일본 나고야, 오사카 증언집회와 교류회에 참여하는 등 지금까지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다. 정부의 ‘위안부’피해 사실을 신고 등록한 국내 피해자는 총 236명. 그중 생존자는 단 60명뿐이다. 부끄럽다는 이유로 남이 알까? 무섭다는 이유로 세상에 자신을 들어내지 못하는 피해자들도 많다. 김복득 할머니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을 위해 그리고 뼈아픈 역사를 깊이 새겨야 할 우리 모두를 위해 오늘도 일본의 진정한 사죄를 원하고 있다.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 및 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 있다면 한국에서 내놨으면 좋겠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NHK 기사 캡쳐)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 잘못 인정은 커녕 또 다른 만행을 저지르며 할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본 일부 극우단체들. 할머니의 아픔이자 우리 모두의 아픈 역사를 외면하는 사람들 이들은 할머니에게 또 다른 상처를 만들고 상처를 깊어지게 한다. 애써 상처를 덮어가며 더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는 김복득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에게도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 2009년 김복득 할머니 증언 > 죽기 전에 정말(일본의) 사죄를 받고, (일본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나는 그게. 그게 제일 소원이다. 다른 건 없다. 나는 이런 말만 하면 때린 듯이 눈물이 난다. 할머니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눈물이다. 할머니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이 눈물과 아픔은 역사를 바로 잡는 밑거름이어야 하며,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죄를 이끌어 내는 힘이어야 한다.
< 고영진/경상남도 교육감 > (김복득) 할머니가 증인이 되셔서 할머니가 일생을 살아오시면서 겪었던 것, 또 일본에 끌려가서 여러 가지 겪었던 것, 그런 생생한 기억들을 우리가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학생들에게 중요한 교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 나레이터 > 이제 세월은 흘러 모든 것이 변하고 열여덟 소녀는 아흔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됐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통해 여성의 존엄성을 말살했던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이행이 실행될 수 있도록 우리가 보다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2009년 김복득 할머니 증언 > 질문자 : 가장 하고 싶으신 게 뭐예요? 할머니 : 그냥 시집, 시집……. 질문자 : 시집가는 거요? 할머니 : 시집가는 거……. 질문자 : 족두리 쓰고 시집가셔서요? 할머니 : 시집가서 그냥 아웅지웅 살아. 할머니 : 요새 나이 많은 노인들도 손잡고 다니잖아. 그런 게 힘이 들더라. 그러고 한 번 살아 봤으면 싶은 거야. 질문자 : 그게 지금 가장 어머니 소원입니까? 할머니 : 그게 가장 소원이야.
< 나레이터 > 김복득 할머니의 소박한 소원, 시집가서 아웅지웅 살고 싶다는 그 평범한 일상을 다음 생의 소원으로 간직해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김복득 할머니의 용기와 그 안에 간직된 희망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